역사
사산왕조 페르시아를 세운 아르다시르 1세는 오늘날 이란 남서부 파르스 지방에 있던 이스타크르(고대의 페르세폴리스)의 조로아스터교 제사장인 사산의 손자이자 이 파르스 지방의 실권자였던 파파크의 아들이다. 왕조의 명칭은 아르다시르 1세의 조부의 이름인 사산에서 유래한다. 이 왕조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를 계승하고 그 중세적 재흥을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로 불렸다.
조로아스터교의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신정국가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이슬람 제국의 정복으로 멸망하기 전까지 고도로 발달된 페르시아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제국의 영토는 오늘날의 이란을 중심으로 하여, 이라크, 아르메니아, 코카서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북부, 튀르키예 동부까지 이르렀으며 호스로 2세의 치세 때는 팔레스타인, 이집트 지역도 제국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고 한다.
정치
아르다시르 1세는 적극적으로 파르티아를 공격했으며 224년에는 파르티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아르타바누스 4세를 패사시켰다. 이후 파르티아 제국 전역을 장악한 아르다시르 1세는 226년 왕위에 올랐으며 크테시폰을 수도로 삼고 주변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동부와 북부를 공격하여 모술, 바레인 등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전역과 시스탄, 발흐 등을 포함한 아르메니아 북부를 점령했다. 229년-232년에는 서쪽의 로마 제국과 충돌하였다. 이때부터 로마 및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갈등은 왕조가 멸망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아르다시르 1세의 재위 기간 중 조로아스터교가 국교로 제정되었고 경전인 아베스타 젠드가 발간되었다. 뒤를 이어 샤푸르 1세는 박트리아와 쿠산제국을 점령했으며 메소포타미아를 침입한 로마 제국과 맞섰다. 로마와의 전쟁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고 제 2차 전쟁 중 에데사 전투에서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잡기도 했다. 로마에 대한 승전을 기념하는 그의 전승기념조상이 매우 유명하다. 한편, 그는 기독교, 유대교 등 정복지 주민들에 대해 관대했는데 다양한 종교를 섬길 수 있도록 했고 특히 마니교에 우호적이었다. 허나 뒤를 이은 바흐람 1세는 마니교를 박해했다.
바흐람 2세에 이르러 사산왕조는 인도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지만 수도 크테시폰이 로마 황제 카루스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며 영토의 상당 부분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점령당하기도 했다. 결국 바흐람 2세를 뒤이은 나르세는 로마와 굴욕적 강화조약을 맺고 국가의 존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뒤를 이은 호르미즈 2세도 시스탄과 쿠산의 반란을 진압했으나 유약한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샤푸르 2세가 집권하며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아랍과 투르크족의 침입을 받고 아르메니아 영유권 문제로 비잔티움 제국과 분쟁을 겪기도 했으나 358년부터 363년까지 계속된 로마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동서방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샤푸르 2세의 사후 바흐람 4세에 이르기까지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비잔티움 제국과 영토 다툼을 몇 차례 겪었지만 큰 혼란은 없었다. 다만, 국내 정치만은 달랐다.
야즈다기르드 1세부터는 동쪽 변경에 투르크계의 에프탈족의 위협이 심화되었다. 이어 바흐람 5세는 중앙아시아의 부족민의 반란을 진압하고 문화적으로 부흥을 이루었으나 그의 아들인 야즈다기르드 2세는 종교적 소수민을 박해하고 무리한 정복활동을 벌여 군사적 손실을 입혔다. 따라서 카바드 1세가 즉위했을 때 통혼 조공등의 외교적 노력을 통해 국력을 회복하기까지 왕조는 큰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쇠퇴한 왕조를 소생시킨 황제는 호스로 1세로 로마, 비잔티움 등 강대국과 충돌하여 승리하였고 주변 이민족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당시 제국의 경계는 안티오키아에서 동쪽으로 중앙아시아 남쪽은 예멘까지 미쳤다. 정세가 안정된 뒤 농지를 개간하고 운하를 건설했다. 요새를 구축하고 성벽을 올려 외부의 침입에 대비했다. 종교적으로는 관용정책을 택하여 조로아스터교에 의해 빚어진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으며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호스로 1세 사후 왕위를 둘러싼 내분이 일어나 국력이 쇠퇴했으며 전쟁으로 정복했던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를 반환하기에 이른다. 내분을 진압 후 즉위한 호스로 2세가 국력을 회복하고자 세금을 부과했으나 지나친 과세로 국민들의 반발을 샀으며 그의 재위 말년에는 코카서스와 아나톨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에 더해 궁정 내 세력 갈등이 격화되었고 야즈다기르드 3세 때 아랍군의 침공을 받아 선전하였으나 637년 까디시야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수도 크테시폰이 포위당했다. 장기전 끝에 수도가 함락되었다.
문화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국가체제는 잘 정비되어 모범적인 것으로서 후세의 무굴제국과 이슬람 국가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전의 파르티아 제국과 비교해서 사산왕조는 강력하고 중앙집권화된 정부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당시의 지도자들은 강력한 왕권과 정부가 있어야만 국가의 안정과 정의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산왕조의 영토가 광대하고, 사회 구성도 매우 다원적이었으나, 많은 역사가들은 사산왕조의 사회가 엄격하게 사제계급, 전사계급, 학자계급, 평민계급의 4계급으로 이루어진 계급사회였을 것이라 보고 있다. 각각의 계급은 태생적으로 결정되었고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바뀌지 않았다. 통치자는 각 계급의 권한과 의무를 적절히 배분하여 균형을 유지하는 일을 했다. 조세 제도와 관련하여 카바드 1세 때부터 토지대장을 작성하여 규칙적으로 세금을 거뒀고 호스로 1세가 이를 발전시켜 인두세와 지조의 조세제도를 새로이 정비하였는데 이 또한 여러 나라에서 채택하였다.
사산왕조의 문화는 비슷한 시기의 어느 문화권보다 눈부시게 발전하였고 비교할만한 것은 비잔틴 문화 정도이다. 특히 동서양을 접하는 길목에 자리잡아 문화적 지적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비잔틴 문화와 마찬가지로 문명의 요람을 평가받는다. 특히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아누스 1세가 아테네 학파를 폐쇄시킨 뒤 많은 신 플라톤파의 그리스 학자가 망명하여 호스로 1세의 보호를 받음으로 철학과 과학을 많이 발전시켰다. 이후 이슬람 제국이 페르시아를 점령한 뒤 발전된 학문을 받아들였으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물 번역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것이 이슬람 제국의 문화적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 인도의 문학서 판차탄트라가 번역되고 다시 아랍어로 중역되어 후세의 설화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예부터 이란의 민족종교는 조로아스터교로 이 왕조에서 국교로 지정되어 국민의 정신생활을 지배하는 문화적 기반이 되었으며 당시 존재한 많은 종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신학 체계를 수립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호스로 1세 때 아베스타 성전이 편찬되고 그 고대어적 표현으로 아람계 문자를 모체로 하는 구어인 팔라비어의 번역 주석 또는 종교 문학이 출현했다.
종교활동에 있어서 관대하였으나 페르시아인 마니가 창시한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에서 파생된 종교였으나 국교인 조로아스터교로부터 배척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종교에 대해 관용정책을 실시하여 비잔틴 제국에서 몇 차례 있었던 기독교와 유대교에 대한 박해를 피해 페르시아로 도피하기도 했다. 특히 야즈다기르드 2세 때 종교 관용 포고령이 발표되어 그 후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사산왕조 내의 기독교 중 가장 활발히 활동하여 수도 크테시폰에 중심지를 두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멀리 중국에까지 교세를 떨쳤다. 다른 기독교 교파들은 주로 제국의 남서쪽 즉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정착하였고 대표적으로 아시리아 교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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