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썸네일형 리스트형 폴란드 왕국 역사 폴란드 민족의 기원이 된 슬라브족은 6세기에 이르러 현재의 폴란드 지역으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폴란드 지역에 정착한 슬라브족은 현재의 폴란드 중부의 위리시자와 서부의 포즈난 등지에서 족장의 지도 아래 부족단위로 생활하며 중부 유럽의 슬라브계 모라비아 왕국과 아시아로부터 유목민의 침략을 막아냈다. 9세기 중반에는 도나우강 북부에 거주하였던 여러 슬라브 부족 중 폴라녜 부족이 점차 세력을 갖춰 10세기 중반 무렵에는 현재 폴란드의 중동부 지역인 마조비에츠키에부터 서로 루부스키에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폴라녜 부족은 주위의 슬라브 부족을 정복하며 중앙집권적인 통치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했다. 10세기 폴라녜 부족의 미에슈코 공작은 폴란드 최초로 왕위에 올라 피아스트 왕조의 시작을 알렸다. 미에슈코 공작은 기독.. 더보기 이반 대제 모스크바 러시아의 토대를 닦은 것은 러시아에서 몽골 지배를 종식시킨 것으로 유명한 이반 3세다. 그는 44년 동안 모스크바의 지배자로 있으면서 동북러시아를 통일하여 오랜 공국시대를 마감하고 러시아를 중앙집권 국가로 만들었다. 그의 치세에 러시아는 열강의 반열에 올라섰고, 모스크바 대공은 '전 러시아의 군주'로서 절대권력을 누리며 온 러시아에 군림하게 된다. 러시아 혁명 때까지 러시아인들에게 공포와 숭배의 대상이 된 '차르'와 '전제군주'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한 것도 그고, 19세기 후반까지 러시아의 지식인과 인민들에게 최악의 제도로 지탄받아오며 혁명의 불씨를 일으킨 농노제의 법적 기초를 마련한 것도 그다. 22살의 나이에 모스크바 대공이 된 이반 3세는 보기 드문 정치수완과 비전을 가진 야심가였다. 그의.. 더보기 러시아 역사 6 우크라이나와 리투아니아 몽골 지배하에서 동북러시아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결속돼가고 있을 때 서부에서는 리투아니아의 힘이 막강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1400년경에는 러시아가 리투아니아 지배하의 서남부와 모스크바 주도하의 동북부의 둘로 나뉘어 각각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키예프 러시아 말기부터 시작된 러시아인의 분화 대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로루시인으로의 분화는 한층 더 심화되어 이후의 러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다. 1240년경 몽골병의 말발굽은 러시아의 서남부를 휩쓸고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바투 칸이 러시아의 동쪽 변방인 볼가 강변의 사라이에 킵차크 한국의 도읍을 세운 탓에, 서부 러시아에는 몽골의 지배력이 그리 강하게 미치지 못했다. 그 틈을 타고 북쪽에서 리투아니아가 뻗.. 더보기 러시아 역사 4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죽은 후 그의 장남 므스티슬라프의 짧은 치세 기간에는 비교적 평온이 유지됐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 남쪽에 사나운 유목민 폴로베츠를 무서운 적으로 둔 채, 키예프 러시아는 형제간 · 숙질간의 난투장으로 변해갔다. 그 와중에서 키예프 러시아는 끝내 크게 넷으로 분열하고 만다. 로스토프와 수즈달과 블라디미르를 중심으로 하는 북동부, 노브고로트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남부, 그리고 남서부의 갈리치 볼린 공국이 그것이다. 분열의 핵은 북동부의 로스토프와 수즈달이었다.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여섯째 아들 유리 돌고루키는 1132년에 로스토프 수즈달 독립공국을 세운 후 지칠 줄 모르는 정열로 북쪽과 동쪽으로 영토를 넓혀나가 '긴 손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의 '돌고루키'란 .. 더보기 러시아 역사 3 키예프의 황금기 블라디미르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다. 그는 아들들을 각지의 공으로 파견하여 러시아를 다스렸다. 1015년에 블라디미르가 죽은 후 4년간의 혈투 끝에 한 아들이 대공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지혜롭다 하여 '무드리(현공)'라 불린 야로슬라프다. 그는 1036년에 공위 계승 투쟁을 최종 마무리 짓고 이후 키예프의 전성기를 엮어낸다. 야로슬라프는 먼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외부로부터 러시아를 방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잇따른 지역 반란을 차례로 진압하고 아들들과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주요 도시에 파견하여 주민들을 엄격하게 다스리는 한편, 볼가 강변에 야로슬라블을 건설하는 등 영토의 확장과 안정에도 힘을 썼고, 남러시아 대초원의 페체네크인을 크게 무찌른 후 변방에 일련의 요새를 건설했다. 대외적.. 더보기 러시아 역사 2 블라디미르는 988년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전 루시인에게 세례령을 내렸다. 이로써 이교 신앙에 젖어 있던 러시아는 기독교 세계에 편입되고, 러시아 사회는 큰 변모를 겪는다. 〈원초 연대기〉에 그리스 정교 수용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블라디미르가 정교를 수용하기 2년 전인 986년, 주변 여러 나라에서 여러 교파의 대표들이 블라디미르를 개종시키려고 그를 만났다. 먼저 유태계 하자르인이 그에게 유태교의 장점들을 설명하며 개종할 것을 설득했다. 블라디미르가 물었다. "유태인이 왜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느뇨?" "하느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노하시어 그 죗값으로 우리를 이방인들 사이에 분산시켰나이다." 블라디미르는 흩어진 민족의 종교에서 장래성을 볼 수 없어 이를 물리쳤다. 이어 블라디미르를.. 더보기 러시아 역사 1 12세기 초에 편찬된 《원초 연대기-지나간 세월의 이야기》는 최초의 루시 국가인 키예프 러시아의 건국 배경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이른바 862년 류리크의 노브고로트 정착 이야기다. 이 전설은 882년 류리크의 한 측근인 올레크의 키예프 건국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노르만 초빙 건국설이 강력하게 대두됐다. 그러나 후세의 연구에서 당시 '루시의 나라'가 세워진 것은 사실이나, 그 이야기 중 많은 부분이 각색된 것임이 드러났다. 당시 12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있던 동슬라브인은 수로상의 요지마다 도시를 세우고, 그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여 작은 공후국들을 발전시켜나갔다. 그중 가장 강력한 것이 6세기 말에 폴랴닌 부족의 한 공후, 키가 동생들과 함께 드네프르 강변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키예프다. 동슬라브인들은 .. 더보기 표트르 1세 표트르는 1672년 차르 알렉세이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나탈리야 나리시키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차르 알렉세이는 슬하에 모두 16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표트르 1세는 다섯의 아들 중 막내였다. 표트르는 돌이 지난 후 유모에게 맡겨져 양육되었다. 4살이던 해인 1676년 차르 알렉세이가 사망하자 아들 중 제일 연장자인 표도르 3세가 차르에 등극했다. 이복형제 표도르의 즉위로 인해 표트르의 모친 나탈리야 키릴로브나와 외가인 나리시킨 가문은 권력에 배제되었다. 표트르 모자의 거처도 크렘린에서 모스크바 근요 왕실 영지인 프레오브라첸스크로 옮겨졌다. 표트르가 어린 시절을 보낸 프레오브라첸스크는 외국인 집단거주지인 독일인촌과 인접해 있었다. 이들의 생활에 호기심을 가졌던 표트르는 자주 독일인촌을 방문하여 외국인들과.. 더보기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