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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시칠리아 왕국 역사 1071년 루지에로 1세는 시칠리아 토후국의 중심지인 팔레르모를 공략한 뒤 시칠리아 백국의 백작을 자처했다. 그는 서유럽 기사와 라틴 성직자들을 시칠리아에 이주하도록 권장하면서도 대다수 인구가 무슬림과 그리스인이고 노르만족은 지독히 소수라는 사실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시칠리아를 자신의 통치하에 두기 위해 국가적 및 종교적 관용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아랍어, 그리스어, 라틴어는 공용어로 쓰였고 기존의 법률은 효력을 유지했다. 루지에로는 다섯 개의 새로운 가톨릭 교구를 시칠리아에 세웠다. 그러면서도 종교적 증오를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기에 가톨릭 선교사들이 시칠리아 무슬림들을 상대로 설교를 금했다. 본래 교회였다가 모스크로 개조된 건물들은 교회로 복원되었으나 새로 지어진 모스크는 유지되었다... 더보기
신성 로마 제국 역사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는 유럽에서의 고대 로마제국의 대부분에 해당되는 지역을 정복 후,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로마교황을 롬바르드족의 공격으로부터 구출해주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800년 교황은 샤를마뉴 대제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 주었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은 제국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 제국은 고대 로마제국의 부활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 후 제국은 독일-프랑스-이탈리아로 삼분할되었으며 이탈리아 지배자가 호칭했던 제호는 얼마 안되어 소멸되었다. 독일에서는 샤를마뉴 대제의 혈통인 카롤링거 왕조가 10세기 초 단절되었고 그 뒤를 계승한 작센 왕조에서 10세기 중엽에 유능한 국왕 오토 1세가 출현하였다. 오토 1세는 밖으로는 마자르인(헝가리인)의 침입을 격퇴하고 국경 부근에 마르크(변경구)를 설정.. 더보기
폴란드 왕국 역사 폴란드 민족의 기원이 된 슬라브족은 6세기에 이르러 현재의 폴란드 지역으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폴란드 지역에 정착한 슬라브족은 현재의 폴란드 중부의 위리시자와 서부의 포즈난 등지에서 족장의 지도 아래 부족단위로 생활하며 중부 유럽의 슬라브계 모라비아 왕국과 아시아로부터 유목민의 침략을 막아냈다. 9세기 중반에는 도나우강 북부에 거주하였던 여러 슬라브 부족 중 폴라녜 부족이 점차 세력을 갖춰 10세기 중반 무렵에는 현재 폴란드의 중동부 지역인 마조비에츠키에부터 서로 루부스키에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폴라녜 부족은 주위의 슬라브 부족을 정복하며 중앙집권적인 통치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했다. 10세기 폴라녜 부족의 미에슈코 공작은 폴란드 최초로 왕위에 올라 피아스트 왕조의 시작을 알렸다. 미에슈코 공작은 기독.. 더보기
이반 대제 모스크바 러시아의 토대를 닦은 것은 러시아에서 몽골 지배를 종식시킨 것으로 유명한 이반 3세다. 그는 44년 동안 모스크바의 지배자로 있으면서 동북러시아를 통일하여 오랜 공국시대를 마감하고 러시아를 중앙집권 국가로 만들었다. 그의 치세에 러시아는 열강의 반열에 올라섰고, 모스크바 대공은 '전 러시아의 군주'로서 절대권력을 누리며 온 러시아에 군림하게 된다. 러시아 혁명 때까지 러시아인들에게 공포와 숭배의 대상이 된 '차르'와 '전제군주'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한 것도 그고, 19세기 후반까지 러시아의 지식인과 인민들에게 최악의 제도로 지탄받아오며 혁명의 불씨를 일으킨 농노제의 법적 기초를 마련한 것도 그다. 22살의 나이에 모스크바 대공이 된 이반 3세는 보기 드문 정치수완과 비전을 가진 야심가였다. 그의.. 더보기
러시아 역사 6 우크라이나와 리투아니아 몽골 지배하에서 동북러시아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결속돼가고 있을 때 서부에서는 리투아니아의 힘이 막강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1400년경에는 러시아가 리투아니아 지배하의 서남부와 모스크바 주도하의 동북부의 둘로 나뉘어 각각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키예프 러시아 말기부터 시작된 러시아인의 분화 대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로루시인으로의 분화는 한층 더 심화되어 이후의 러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다. 1240년경 몽골병의 말발굽은 러시아의 서남부를 휩쓸고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바투 칸이 러시아의 동쪽 변방인 볼가 강변의 사라이에 킵차크 한국의 도읍을 세운 탓에, 서부 러시아에는 몽골의 지배력이 그리 강하게 미치지 못했다. 그 틈을 타고 북쪽에서 리투아니아가 뻗.. 더보기
러시아 역사 5 키예프 러시아 말기에 키예프의 한 대공이 자신의 아들을 노브고로트의 공으로 앉히려 했다. 노브고로트의 민회는 대공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들의 뜻을 전했다. "대공님, 우리는 우리의 도시에서 귀공도 또 귀공의 아드님도 바라지 않는다는 명확한 사실을 대공님께 전합니다. 만약 공자께서 머리가 둘이시라면 우리에게 보내주십시오." 위의 일화에서도 보이듯이, 러시아 제2의 도시였던 노브고로트는 키예프 러시아 말기에서 몽골 지배 초기에 독특한 정치체제와 생활양식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공의 권한이 점점 커지면서 전제군주가 태동하던 블라디미르 등지의 북동부 지역이나, 귀족들의 힘이 커져 귀족지배 경향이 나타나던 남서부 지역과 달리, 북부의 노브고로트에서는 시민과 민회의 힘이 커져 공화제 경향을 보였다. 정치체제와 시민.. 더보기
러시아 역사 4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죽은 후 그의 장남 므스티슬라프의 짧은 치세 기간에는 비교적 평온이 유지됐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 남쪽에 사나운 유목민 폴로베츠를 무서운 적으로 둔 채, 키예프 러시아는 형제간 · 숙질간의 난투장으로 변해갔다. 그 와중에서 키예프 러시아는 끝내 크게 넷으로 분열하고 만다. 로스토프와 수즈달과 블라디미르를 중심으로 하는 북동부, 노브고로트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남부, 그리고 남서부의 갈리치 볼린 공국이 그것이다. 분열의 핵은 북동부의 로스토프와 수즈달이었다.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여섯째 아들 유리 돌고루키는 1132년에 로스토프 수즈달 독립공국을 세운 후 지칠 줄 모르는 정열로 북쪽과 동쪽으로 영토를 넓혀나가 '긴 손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의 '돌고루키'란 .. 더보기
러시아 역사 3 키예프의 황금기 블라디미르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다. 그는 아들들을 각지의 공으로 파견하여 러시아를 다스렸다. 1015년에 블라디미르가 죽은 후 4년간의 혈투 끝에 한 아들이 대공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지혜롭다 하여 '무드리(현공)'라 불린 야로슬라프다. 그는 1036년에 공위 계승 투쟁을 최종 마무리 짓고 이후 키예프의 전성기를 엮어낸다. 야로슬라프는 먼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외부로부터 러시아를 방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잇따른 지역 반란을 차례로 진압하고 아들들과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주요 도시에 파견하여 주민들을 엄격하게 다스리는 한편, 볼가 강변에 야로슬라블을 건설하는 등 영토의 확장과 안정에도 힘을 썼고, 남러시아 대초원의 페체네크인을 크게 무찌른 후 변방에 일련의 요새를 건설했다. 대외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