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죽은 후 그의 장남 므스티슬라프의 짧은 치세 기간에는 비교적 평온이 유지됐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 남쪽에 사나운 유목민 폴로베츠를 무서운 적으로 둔 채, 키예프 러시아는 형제간 · 숙질간의 난투장으로 변해갔다.
그 와중에서 키예프 러시아는 끝내 크게 넷으로 분열하고 만다. 로스토프와 수즈달과 블라디미르를 중심으로 하는 북동부, 노브고로트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남부, 그리고 남서부의 갈리치 볼린 공국이 그것이다.
분열의 핵은 북동부의 로스토프와 수즈달이었다.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여섯째 아들 유리 돌고루키는 1132년에 로스토프 수즈달 독립공국을 세운 후 지칠 줄 모르는 정열로 북쪽과 동쪽으로 영토를 넓혀나가 '긴 손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의 '돌고루키'란 별명을 얻었다. 모스크바 창건자로도 이름 높은 유리 돌고루키는 수즈달 공국을 안팎으로 다져나가면서 1155년에는 키예프까지 공격해 키예프 대공에 올랐으나 2년 후에 죽고 만다.
그의 뒤를 이은 안드레이 보골류프스키는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1169년 키예프로 쳐들어가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북동부의 블라디미르를 러시아의 새로운 중심으로 만든다. 그로써 키예프는 '러시아 모든 도시들의 어머니'라는 명성을 잃고 일개 공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안드레이 보골류프스키는 블라디미르와 그 인근에 화려한 궁전과 아름다운 성당을 짓는 등, 키예프를 능가할 만큼 도시를 예술적으로 꾸몄다. 수공업과 상업도 크게 발전하여 블라디미르는 12세기 종반부터 약 1세기 동안 전성기를 누리다가 그 후 새로운 별로 떠오른 모스크바에 바통을 넘긴다. 이 시기가 바로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시대로 블라디미르 대공이 온 러시아의 지배자로 군림한다.
한편, 북쪽에서 유서 깊은 도시 노프고로트가 있었다. 활발한 상업과 수준 높은 문화를 자랑하며 독자적인 화폐와 법률과 군대를 가지고 있던 노브고로트는 키예프가 약해짐과 함께 점점 그 세력을 확장해갔다. 노브고르트와 인근의 프스코프는 특히 민회가 활발한 것으로 유명했다. 이 민주제의 전통이 계승되어 러시아 정치 전통의 한 맥을 형성한다.
위세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교역도 거의 끊겨버린 남부의 키예프는 끝없이 밀려오는 폴로베츠인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했다. 정치적으로도 혼란이 계속되어 모노마흐의 사후 50년간 대공이 18번이나 바뀌었다. 1204년 비잔티움이 제4차 십자군 원정대에 정복되면서 비잔틴 제국과의 우호관계가 끊긴 후에는 산업이 더욱 피폐해져 인구도 크게 감소했다. 1240년 키예프는 결국 몽골족에게 점령당하면서 한동안 버려진 도시가 된다.
키예프가 쇠락하면서 많은 러시아인이 남서쪽 드네프르 강과 드네스트르 강 상류 지역으로 이동했다. 거기서 갈리치 볼린 공국이 성장하여 키예프 유산의 상당부분을 계승한다. 남서부에서는 공을 비롯한 지방제후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루시의 분열, 특히 남서부로의 진출은 러시아사에서 중요한 전기를 이룬다. 이후 남서부 전역과 남부의 일부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북부나 북동부와는 대비되는 새로운 경험을 쌓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러시아인은 대러시아인과 소러시아(우크라이나)인, 벨로루시인의 셋으로 갈라진다.
이리하여 키예프 러시아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 빛은 오늘날까지도 살아남아 러시아인들에게 애틋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공통의 종교와 언어 · 법률 · 문화를 가지고 있던 러시아가 위대한 나라로 발전하리라는 희망에 가슴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곧 절망으로 변하고 탄식만이 남는다.
번성하던 키예프 러시아가 몰락한 이유로는 여러 요인이 지적되고 있다. 키예프 공국의 허술함, 통치체제의 취약성, 지방 분권화 경향의 심화, 분화된 계층간의 사회적 갈등 등이 모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지중해 무역이 번성하고 동로마 제국이 무너지면서 유럽의 중요 교역로의 하나였던 러시아의 내륙수로를 이용한 교역이 크게 파괴된 점, 그리고 페체네크인, 폴로베츠인, 몽골인으로 이어지며 끝없이 계속된 외침에 있지 않았나 싶다.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전승되던 빌리나(영웅 서사시) 하나에 러시아 땅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내려온다.
러시아가 형제들의 싸움으로 기진해가고 있을 무렵, 저 멀리 동쪽의 몽골 고원에서는 무서운 세력이 자라나고 있었다. 1206년 한 몽골 부족장의 아들 테무진이 전 몽골족을 통일하고 그 우두머리가 되면서 칭기즈칸의 칭호를 얻은 것이다. 칭기즈칸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에게 지상에 정의를 다시 세우는 신성한 사명이 부여됐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양 세계는 물론 중국에게도 몽골족은 대수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네 터전인 고비 사막과 주변의 거친 초원지대에서 부족들 간에 아웅다웅하며 살고 있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그들이 온 세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세계를 자기네 발아래 무릎 꿇렸다.
1211년 칭기즈칸은 불과 10만 군사를 이끌고 만리장성을 넘었다. 그리고 5년 후 1억 인구의 중국을 정복했다. 그리고는 서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중국인 기술자들로 증강된 몽골의 대군은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를 단숨에 유린한 후, 북쪽으로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러시아 땅으로 질풍처럼 달려들어 왔다.
러시아 땅에서 맨 먼저 부딪친 것은 폴로베츠인이었다. 첫 번째 싸움에서 몽골의 위세에 경악한 폴로베츠인은 오랜 숙적이었던 러시아의 공들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몽골족이 오늘은 우리 땅을 뺏었지만, 내일은 당신들 땅을 뺏을 것입니다."
사태의 심각함을 알고 많은 공들이 원군을 파견했다. 그리하여 1233년 돈 강의 지류인 칼가 강변에서 러시아 폴로베츠 연합군과 몽골군이 격렬히 맞붙었다. 몽골군은 연합군에게 처참함 패배를 안겨주고는 동쪽으로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이것이 몽골과 러시아의 서전인 카가 전투다.
칭기즈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은 1236년 조카 바투에게 15만의 병사를 주어 다시 러시아로 보냈다. 전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은 바투의 유럽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바투의 원정군에 맞선 러시아의 군대는 용감히 싸웠으나 몽골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단지 바투의 군대가 대군이라서만이 아니었다. 몽골군은 당시 어느 군대도 따를 수 없는 조직력과 무기 ·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몽골군은 기동성이 뛰어난 기병으로, 중장 기마대와 경장 기마대를 함께 운용했으며, 군대를 10명, 100명, 1,000명 단위로 편성하고 지휘부에는 참모부를 두는 등, 잘 조직되어 있었다. 또 정찰과 첩보공작을 조직적으로 전개했고, 투석기와 파벽기를 앞세운 공성술도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전략도 다양하게 구사했다. 예컨대 야전에서는 보조부대를 진의 중앙에 두고 양측방에 활을 가진 주력부대를 배치했다. 적병이 돌격해 들어오면 중앙이 후퇴하면서 양측방에서 적에게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적병은 처음엔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나 곧 함정에 빠져들었음을 깨닫는다.
몽골군은 적의 용기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했지만 자비심을 베푸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칭기즈칸이 '후회는 동정의 열매'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투는 우랄 산맥을 넘어 먼저 볼가 불가르인을 공략했다. 그리고 1237년 뜻밖에도 북쪽에서 돌연히 나타나 러시아 동부의 랴잔 공국을 들이쳤다. 랴잔의 병사는 물론 온 시민이 나서서 끝까지 항전했으나, 5일간의 싸움 끝에 도시는 함락되고 시민들은 몰살당했다.
다음 차례는 블라디미르 대공국이었다. 1237~1238년 사이의 겨울에 몽골군은 얼어붙은 강을 빠른 속도로 건너다니며 당시 러시아 최강의 군대를 가지고 있던 대공국의 여러 도시를 휩쓸었다. 아마도 역사상 러시아를 겨울에 침략하여 성공한 유일한 예일 것이다.
이어서 야로슬라블과 트베리, 볼가 강변의 여러 도시가 몽골군의 발굽 아래 초토화됐다. 노브고로트를 비롯한 북서부 지역만은 유일하게 화를 면했다. 얼음이 풀려 그 일대가 뻘수렁으로 변하면서 몽골군이 전진을 포기하고 초원지대로 말머리를 돌렸기 때문이다.
초원지대를 평정하며 잠시 재정비를 마친 몽골군은 이제 남러시아로 들이닥쳤다. 1240년 키예프가 점령되어 주민이 모두 죽거나 노예가 되었다.
몽골군은 이어 갈리치와 볼린을 휩쓸고 러시아의 국경을 넘어 폴란드와 헝가리로 쳐들어갔다. 폴란드에 침입한 몽골군은 계속 서진해 슐레지엔의 발슈타트 전투에서 독일군을 크게 무찔렀고, 헝가리로 진출한 몽골군의 선발대는 아드리아 해안까지 나아갔다. 온 유럽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것이다.
그때 몽골 본국의 카라코룸에서 오고타이 칸이 죽었다는 전갈이 왔다. 바투는 군대를 초원지대로 불러들여 1243년 볼가 강변의 사라이를 도읍으로 킵차크 한국을 세웠다. 이후 온 러시아는 킵차크의 칸에게 무릎을 꿇고 몽골의 지배를 받는다.
러시아인들은 몽골의 러시아 지배를 굴욕적인 표현을 써어 '타타르의 멍에'라고 불렀다. '타타르'라는 말은 본디 몽골의 한 부족명이었으나, 러시아에 그 말이 전해지면서 '지옥'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타르타로스'와 겹쳐져 몽골족을 총칭하는 말로 쓰이고, 그 후 다시 투르크계 민족들까지를 포함하는 유목 기마민족 전체를 아우르는 의미를 갖는다.
몽골의 침략과정과 지배하에서 러시아의 문화는 크게 파괴당하고 사회와 경제는 큰 굴절을 겪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