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는 988년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전 루시인에게 세례령을 내렸다. 이로써 이교 신앙에 젖어 있던 러시아는 기독교 세계에 편입되고, 러시아 사회는 큰 변모를 겪는다.
〈원초 연대기〉에 그리스 정교 수용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블라디미르가 정교를 수용하기 2년 전인 986년, 주변 여러 나라에서 여러 교파의 대표들이 블라디미르를 개종시키려고 그를 만났다.
먼저 유태계 하자르인이 그에게 유태교의 장점들을 설명하며 개종할 것을 설득했다. 블라디미르가 물었다.
"유태인이 왜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느뇨?"
"하느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노하시어 그 죗값으로 우리를 이방인들 사이에 분산시켰나이다."
블라디미르는 흩어진 민족의 종교에서 장래성을 볼 수 없어 이를 물리쳤다.
이어 블라디미르를 이슬람교로 개종시키고자 동쪽에서 볼가 불가르인이 왔다. 불가르인의 대표는 "이슬람교도들에게는 내세에서 무함마드가 미녀 70명씩을 주신다"면서 호색한인 블라디미르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계율에 금주 조항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이렇게 말하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술은 러시아인의 기쁨이다. 우리는 이 낙이 없이는 살아가지 못한다."
로마 교황정과 비잔틴 교회에서 파견된 사절들이 블라디미르의 눈에는 반갑게 비쳤다. 할머니 올가가 957년에 이미 그리스 정교로 개종하는 등, 기독교가 이미 러시아 사회에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는 사신을 보내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를 비교 분석케 했다.
독일에서 로마 교회의 의식을 관찰하고 돌아온 사신은 거기서 "아무런 영광도 보지 못했노라"고 보고했다.
반면에 비잔티움의 소피아 대성당에 간 사신은 그 의식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우리는 거기가 천상인지 지상인지 알 수 없었나이다. 그 장중함과 아름다움은 분명 지상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묘사할 말을 찾을 수가 없나이다."
블라디미르는 마침내 그리스 정교를 선택했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에 담긴 의미는 깊다. 당시 이미 동서양 문화의 교차로에 서서 두 문화를 두루 받아들이고 있던 키예프 러시아는 서양문명을 상징하는 기독교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유럽 세계의 일원으로 편입시켰다. 그 선택에는 인접국인 폴란드 · 덴마크 · 노르웨이 · 헝가리 등이 속속 기독교를 수용하고 있는 현실이 크게 작용했다. 동양 세계의 왼쪽 날개가 되기보다는 유럽 세계의 오른쪽 날개가 되는 것이 더 유리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편으로 키예프 러시아는 가톨릭이 아니라 그리스 정교를 수용함으로써, 서유럽 국가들에서 멀어지면서 가톨릭을 수용한 인접국들, 특히 폴란드와의 오랜 반목과 투쟁의 길을 걷게 된다. 이에는 그리스 정교 의식이 아름다움 외에, 당시 러시아가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져 라틴 문화가 전혀 형성되지 않았던 점, 성서를 슬라브어로 번역하는 등 그리스 정교회의 사도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러시아 전도에 나섰던 점 등이 크게 작용했다.
사실 당시에는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 세계의 대립과 반목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이 쇠잔하면서 러시아가 사실상 정교의 종주국이 되고, 그 후 러시아 정교에 슬라브적이고 동방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러시아가 유럽 사회에서 고립되는 한 요인을 형성하게 된다.
개종 후 블라디미르는 180도 태도를 바꿔 신을 두려워하는 도덕적인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가난한 자를 돕고 죄인에 대한 형벌을 가볍게 했다. 이교도의 우상도 타파하고 각지에 교회도 세웠다. 후일 그는 러시아 교회의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루시의 세계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는 진통이 없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비교적 큰 무리 없이 기독교화가 진행되었다. 농민들 사이에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이교도의 전통이 전해내려오긴 했으나, 정교가 민간신앙 요소를 많이 흡수하면서 농민들을 기독교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한편, 루시의 지배자들은 기독교를 적극 환영했다. 그들은 기독교에서, 거칠고 야만스러운 이교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통일감과 목적의식을 발견했다. 새 종교는 또 그들에게 문명세계에의 소속감을 심어주었다.
996년 키예프에 첫 교회당인 십일세 교회가 세워짐을 시작으로 하여 러시아 곳곳에 많은 교회가 들어섰다. 러시아의 교회는 종교로서의 역할 외에, 글자를 가르치고 야만적인 관습을 순화시키는 기능이 있었으며, 어느 정도는 법률의 역할도 했다. 또 키릴 문자의 보급과 함께 러시아 문화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또한 기독교는 정치적으로 키예프의 군주와 국가에게 나라의 통합을 촉구하고 동시에 비잔틴, 그리고 기독교 세계 전체와의 유대를 강조하는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다. 러시아 교회는 차츰 중심적인 사회 기구로서 자신의 기반을 다져갔다.
정교의 도입과 함께 러시아에는 비잔틴 문화가 쏟아져 들어왔다. 문학 · 예술 · 법률 · 풍속 · 관습 등 모든 분야에서 러시아는 비잔틴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건축과 회화 분야는 비잔틴의 영향으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11세기 중반에 키예프와 노브고로트, 두 곳에 세워진 성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받은 뛰어난 건축물로 꼽히며, 그밖에 키예프 근교의 페체르스키 수도원, 블라디미르의 우스펜스키 성당과 드미트리 성당, 블라디미르 근교 넬리 강변의 포크로프 성당도 유명하다. 또, 비잔틴 양식의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화, 부조로 만든 성화 상이 유행하여 성당 등 건축물의 내부를 아름답게 장식했다.
서양 언어에서 라틴계 알파벳에 익숙한 우리는 N자를 거꾸로 써놓은 듯한 글자나 그리스 대문자의 델타(Δ)나 파이(Π) 비슷하게 생긴 글자를 사용하는 러시아 문자를 보면 당혹스럽다. 그 이색적인 러시아어 자모는 9세기 말에 만들어진 키릴 자모를 개량한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글자꼴을 갖춘 것은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때다.
러시아에 키릴 문자가 들어온 것은 기독교의 전래와 관계가 깊다.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그 전례 언어를 기록하는 문자로서 키릴 문자가 함께 들어온 것이다.
9세기 말부터 10세기에 걸쳐 슬라브인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힘을 쏟은 선교사들 가운데에 그리스인 키릴로스가 있었다. 키릴로스는 860년대에 형 메토디오스와 함께 지금의 체코인 모라비아의 슬라브인들에게 선교를 시작했다. 그때 선교의 필요에 의해 슬라브어 발음을 토대로 하여 글자를 만들었다. 그것이 글라골 문자고, 그 문자체계에 상응하여 형성된 언어체계가 고대교회 슬라브어다. 그는 그리고 정교의 성서와 전례를 교회 슬라브어와 글라골 문자로 번역했다.
이어 그의 제자들이 9세기 말에 불가리아에서 글라골 문자를 발전시켜 키릴 문자를 고안해냈다. 그들은 사람들이 익히고 쓰기 쉽도록 비교적 단순한 그리스 알파벳 대문자를 많이 활용했다. 선교사 키릴로스의 슬라브 명 '키릴'을 따 '키릴 문자'로 이름 지어진 이 문자는 점차 슬라브 권의 동부에 퍼지면서 러시아어, 불가리아어, 세르비아어, 마케도니아어를 기록하는 문자로 정착한다.
10세기 들어 선교사들이 러시아에 내왕하면서 먼저 교회 슬라브어와 글라골 문자가 들어오고, 곧이어 키릴 문자가 따라 들어왔다. 11세기까지는 성서와 설교집 · 기도문 · 찬송가 등에 글라골 문자와 키릴 문자가 함께 쓰였으나, 그 후에는 키릴 문자만이 살아남아 오늘의 러시아 문자로 이어졌다.
교회 슬라브어와 키릴 문자는 기독교의 전파를 목적으로 도입됐으나, 이후 러시아의 문화유산을 기록 · 보존 ·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먼저 각종 종교서적을 포함하여 그리스 · 로마의 많은 문헌들이 번역됐고, 이어 역사적 사건이나 각종 제도들이 문자로 기록되면서 키예프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큰 몫을 했다.
문자의 도입으로 국가의 기틀이 확고하게 다져지면서, 그와 함께 키예프의 기록문학도 급속도로 성장했다. 먼저, 기독교와 관련된 기록들이 나왔다. 성서 설화 모음집, 설교집, 찬송가, 성자들의 생애기록 등이다.
그중 유명한 것으로 페체르스키 수도원 성자들의 생애 모음집인 《파테리콘》과, 초창기의 가장 훌륭한 신학자이며 설교자였던 힐라리온의 설교집 《율법과 은총》이 있다.
이어 주로 수도사들에 의해 많은 연대기가 쓰였다. 이 연대기들은 다소 종교적으로 각색된 바가 없지 않지만, 러시아 초창기 역사의 구체상을 전해주는 자료로서 값진 의미가 있다. 최초의 연대기는 11세기 중엽부터 쓰여 12세기 초에 편찬된 〈지난 세월의 이야기〉로, 흔히 '원초 연대기'라 불린다. 이후 17세기에 이르기까지 키예프와 노브고로트, 블라디미르에서 많은 연대기가 편찬됐다.
세간 문학으로는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유훈〉과 작자 불명인 〈이고리 공 원정기〉가 유명하다. 이중 푸시킨이 "우리나라 문학의 황야지대에 홀로 외롭게 우뚝 선 기념비"라고 부른 〈이고리 공 원정기〉는 1185년 폴로베츠인과의 싸움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운율을 가진 산문으로서 서사시와 서정시의 요소를 훌륭하게 결합시키고 있는 이 작품은 인상적인 이미지와 시적인 서정미, 생생한 표현, 넘치는 힘이 너무도 경탄스러워 후세의 모작이라는 논쟁까지 불러일으킨 바 있다.